■헬레니즘
그리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눈부시게 발전된 시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리스의 주축이었던 아테네의 권력남용이 심해지자 이에 반하는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새롭게 만들어 지면서 갈등이 발생된다. 기원전 431년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편으로 갈라져 전쟁을 치르게 되고, 스파르타가 중심에 있었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승리하였다. 이로인해 그간 그리스의 힘이었던 굳걷한 동맹이 와해되면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게다가 이 시기를 틈 타 북쪽의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에서 패권을 잡은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넘보기 시작했다.
결국 꾸준히 국력을 쌓고 있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본토를 공격하여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포함하여 그리스 동맹국가들을 굴복시키는데 그는 점령이 아닌 동맹으로 그리스의 대부분의 문화와 영토, 자유를 보장하면서 친마케도니아 인사를 영입하는 등의 정치적 제재를 가하는 것에 그친다.
이후 그리스인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두었던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이 소아시아의 여러 국가들과 서아시아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페르시아와의 전투에 승리하면서 이집트를 포함하여 현재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까지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한다. 그리스 본토 최북단에서 시작하여 인더스강을 국경으로 인도와 마주하는 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친 그리스 성향이 강했던 알랙산더 대왕의 제국 건설로 인해 그리스의 조형언어는 지중해 연안의 국가뿐만이 아니라 소아시아에 널리 전파된다. 대왕은 우수한 그리스 문화를 점령지인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와 같은 나라에 자리잡게 하려 했으며, 코린트 동맹으로 마케도니아 군과 함께 원정길에 올랐던 그리스인들은 정복 정책의 일환으로 해당 국가의 정부관료로 임명했는데, 이로 인해 그리스 문화는 더욱 빠르게 스며들게 되었을 것이다.
필리포스 2세에 이어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세와 무수히 섞여가는 각국의 문화 속에서 그리스의 조형언어는 주축이 되어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기존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하며 새로운 변화를 가진다. 페르시아를 멸망 시킨 알렉산더 대왕이 32세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죽게 되면서 짧은시간 하나의 국가로 묶였던 세계는 다시 분열된다. 시리아 왕국이 일어나 소아시아를 차지했고, 이집트 왕국이 아프리카의 북쪽을, 나머지 땅은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다스리면서 세계는 예측할 수 없는 앞으로의 미래와 혼란 속에 놓여진다. 후에 로마에 의해 통합되기 전까지의 시기를 헬레니즘(Hellenistic period) 이라 부르는데 헬레니즘이란 그리스의 정신, 문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스 건축양식의 마지막 코린트양식은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 시기에 탄생했다. 아칸투스 잎을 보고 만들었다는 코린트 기둥양식은 화려한 기둥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후대로 갈수록 이오니아식과 코린트식의 기둥을 많이 사용했다.
헬레니즘의 성격을 단번에 보여주는 유물로 언급되는 것은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이 있다. 소아시아에 위치한 페르가몬은 그리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스와 같이 도시 언덕 아크로폴리스에 신전, 도서관, 극장들이 세웠으며 당시 헬레니즘 시기 문화적 중심지 중 하나였다. 제우스 제단은 기원전 175년경 지어진 것으로 이름있는 페르가몬과 그리스인 조각가들이 함께 작업 했다고 한다. 페르가몬 왕국을 세운 아버지 아탈로 1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신전은 헬레니즘 시기 이전의 그리스의 신전을 함께 본다면 매우 파격적인 변화를 보여 준다. 원래는 신전 기둥 위에 팀파눔과 메토프에 새겨진 부조를 신전 기둥 아래에 위치시켜 훨씬 더 넓은 면적에 위치하게 하고 관객들이 이 부조를 수평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가로 길이만 36.5m 높이는 10m에 달하는 거대한 신전으로 평면도의 ‘ㄷ’자 형태의 모양도 흥미롭다.
신전 둘레에 새겨진 부조들은 헬레니즘 시기의 조각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조라기 보다는 환조를 벽면에 붙여놓은 것처럼 보이는 튀어나올 듯한 양감에 인물의 표정과 동작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이다. 인물이 입고 있는 옷자락 하나하나도 깊게 파여 그 음영이 극단적이다. 헬레니즘 시기 조각은 대체로 감정을 분출하는 듯한 격렬함을 가지고 있는데, 페르가몬 제단의 부조를 보면 신에게 짓밟히는 거인족의 암울한 표정과 절망하는 몸짓, 그와 대비되는 신들은 펄럭이는 의상을 갖춰 입고 하늘을 날며 여유롭게 거인족들을 대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페르가몬은 그리스의 신과 영웅을 한 편에 두고 반인반수와 같은 괴물을 한편에 두는 그리스의 선과 악을 구분하는 표현법을 그대로 가져왔다. 당시 그리스 인은 그들 외의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 소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야만족으로 여기곤 했는데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야만족은 반인반수와 같은 괴물로 표현되곤 했다. 제단을 제운 아탈로 1세의 아들 에우메네스는 아버지 제위시절 그들의 야만인인 갈리아인과의 전투 승리를 그리스 신화인 신과 거인족의 전투를 가져와 기린 것이다.
제단 외에 페르가몬 유물중엔 광장에 위치했던 갈리아인에 대한 군상들이 있다. 하나같이 그들의 비극적 죽음과 운명을 표현한 모습들이었다. 아탈로 1세는 페르가몬이 적을 처참하게 파괴하는 모습이 아닌 적의 절망을 보여줌으로써 왕의 신화를 높이고자 했다.
스페롱가 포도 밭에서 묻혀 있던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은 발견 당시 어마어마한 이슈를 만들었다. 라오콘과 두 아들들이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몸짓과 그들의 온 몸을 휘감는 뱀, 무정한 하늘을 바라보는 라오콘의 얼굴과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묘사는 놀라울 정도로 생동감 있다.
신화에 따르면 라오콘은 트로이의 사제로 그리스에서 온 트로이 목마를 받아들이지 말자고 주장한다. 라오콘은 그 안에 그리스인의 속셈이 있을 것을 꿰뚫어 본 것인데, 트로이의 멸망을 바랐던 그리스 신들이 바다 뱀을 보내 방해물인 라오콘과 그의 아들을 휘감아 질식시키는 장면이다.
자신의 의도대로 일을 꾸미기 위해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무정한 신에 대한 내용을 담은 작품에 조각가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어쩌면 조각가에게 표현한 주제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 헬레니즘 시기 이전부터 조각가와 화가의 위치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프락시텔레스의 크니도스의 비너스의 경우 조각을 위해 신전이 건설되었다. 사람들은 유명한 미술가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기꺼이 배를 타고 이동했고 아름다운 조각과 신전은 관광 상품이 되었다. 조각가와 화가들은 더 이상 신과 신전만을 작업하지 않았다. 그들은 끝없이 쏟아지는 관심과 수요에 맞춰 스스로의 솜씨를 뽐내고자 했으며 좀 더 잘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라오콘의 비참한 운명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이 조각가에게 전혀 관심 밖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오디세이>도 헬레니즘 시기에 만들어진 조각이다. 오디세이의 신화 속 키클롭스 동굴 탈출기이다. 10년 간의 전쟁을 끝내고 고향 이티카로 돌아가려던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우스가 사는 섬에 도착한다. 괴물의 저녁밥이 되고 있던 선원들과 꾀를 내어 폴리페우스를 술에 취해 잠들게 한 후 눈을 창으로 찔러 장님으로 만들고 섬에서 탈출한다.
위 조각은 잠든 폴리페우스의 눈을 찌르는 가장 긴장감 넘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조각의 일부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웅장함은 훼손되지 않았으며 남아있는 등장인물로도 손에 땀을 쥐는 긴박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거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인물들의 표정은 매우 비장하다.
헬레니즘 시기는 그리스 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과 소아시아에 위치한 모든 이들에게 격변의 시기 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전쟁으로 그리스를 포함한 여러나라가 가지던 공동체가 와해되었고 국가의 권력은 더이상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다. 점령지 내 어느곳에서든 이동해 살 수 있었으며 이것은 기회와 행운이 되기도 절망과 불행이 되기도 했다. 이는 미술품에 반영되어 조각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몸짓은 뒤틀리며 근육과 옷자락과 같은 묘사는 역동적게 됬다. 헬레니즘의 미술은 누구보다 격렬하고 화려하고 압도하는 깊은 인상을 갖길 원했고 창작가들은 그러한 것들을 만들었다. 과거 그리스가 그들의 지역에서만 유명했을 시기에 보이던 균형의 아름다움은 역동적인 움직임이 되었고 이상적인 영원한 아름다움 보다는 순간의 감정을 분출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그리스의 조형언어가 남부유럽과 북 아프리카 북인도에까지 퍼져 나가면서 그 성격과 방향, 주제도 다양해졌는데, 이상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늙음과 추함, 기이함이나 에로틱함과 같이 이전 고대 그리스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형상을 표현하기도 했다. 또 다른 특이점은 초상의 표정의 변화가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스 본토의 조각은 그 어떤 인물이든 무표정을 고수한다.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다양해지면서 표정의 필요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추구하던 미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경험과 취향이 반영된 작품을 만들게 되면서 술파는 노인, 곱추, 남여의 성이 함께 있는 헤름아프로디테와 같은 것들이 있다. 동시에 이 속에서 고전적 미를 추구한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의 경우 이 헬레니즘 시기에 고전미의 향수를 담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리스의 번영기에 발달했던 회화는 아쉽게도 2500여 년의 흐름과 함께 소실되어 문헌으로 확인하는 것이 전부 다 도기에 그려지던 회화는 조각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더 사실적이어졌으며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기를 거치며 대형벽화로 발전되었다. 기원전 4세기 초에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가 당시 유명한 화가로 언급되며 4세기 말에는 아펠레스의 이름이 이야기 된다.
당시 최고 실력자였던 아펠레스는 당시 최고 권력자 알렉산더 대왕의 궁중화가였다. 그의 이전에도, 그의 이후에도 그를 능가하는 화가는 아무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의 작품을 눈으로 확인 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역사화 중 하나를 모작하여 모자이크로 만든 복제품이 폼페이에 존재한다. 모자이크로 작업한 것이라 원본과 차이가 있을 테지만 그가 그린 웅장한 역사화를 대강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원본은 <익수스 대전>으로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에게 이긴 전장을 그린 그림이다. 마차를 타고 후퇴하는 다리우스 3세가 뒤를 돌아보며 뒤쫓는 알렉산더 대왕과 시선을 맞추고 있다. 여러 병사와 말, 무기들이 얽히고 설켜 있는 와중에도 그 둘의 긴장감이 잘 느껴진다.
그림 속 알렉산더 대왕은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투구를 쓰지 않은 채 말을 타고 달리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신화 속 영웅처럼 묘사된 부분이 많은데 문헌에 따르면 그리스 영웅들의 이야기가 담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애독하였고 스스로를 영웅 혹은 신의 아들로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화가와 조각가로 하여금 영웅적인 면모를 돋보이게 연출했던 지도자로 로마에서 복제한 그의 조각상을 보면 고대 그리스 조각상을 보는 듯 젊고 아름다우며 균형잡힌 몸매로 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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