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로마미술은 그리스 미술의 계승하여 신전이 아닌 실용적인 공회당, 욕장, 콜로세움, 개선문 등이 건축되었다. 황제와 장군들의 권위와 용맹성을 나타내는 사실적인 초상 조각이 많이 제작되었으며,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탑과 조각상들이 제작되었다. 로마 시대 벽화에는 생동감 넘치는 시민들의 생활 모습이 담겨있다.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국가였던 로마는 공화정 체제를 가진 국가로 점차 힘을 키워 기원전 3세기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며 제국을 힘을 기르기 시작한다. 당시 지중해 연안 강자였던 카르타고와 3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치른 후 유럽의 절반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을 모두 차지하게 된다. 원로원과 군사력을 장악하던 장군들 사이에서 권력의 줄다리기가 끝나고 원로원이 인정한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황제시대를 시작한다. 초대 황제 이후로 200년간 로마는 ‘팍스 로마나’ 라는 별명에 걸맞게 더없이 안정적이고 부유한 생활을 했다. 로마는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고 식민지를 개척해 그곳의 노예와 자원을 들여왔으며 도로를 깔아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 이전 그리스가 차지했고, 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가 차지했던 땅을 로마가 차지했다. 이후 로마 제국은 1000년의 시간동안 번영과 쇠퇴를 반복하며 제국 곳곳에 그들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프랑스의 파리와 영국의 런던, 터키의 이스탄불, 그리스의 아테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튀니지의 카르타고, 예루살렘은 모두 로마제국 시절 주요도시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는 국가 자체가 유적지이다. 과거 로마 제국의 본토였던 덕에 곳곳에 유물들이 등장하여 신도시 건설이 어려울 지경이라고도 한다. 특히 로마시의 경우 중심지에 위치한 콜로세움과 전차경기장, 황국, 수로교, 신전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로마의 유적 중 꼭 봐야할 것이 있다면 당연 콜로세움이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80년경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설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티누스 황제때 세워진 것으로 관람객 5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공공건축물이다. 사실 콜로세움은 이탈리아와 로마 제국령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현재 로마시에 있는 것만을 콜로세움이라 부른다. 로마 시가지의 콜로세움은 이전 폭군 네로황제의 황금 궁전 자리에 지어졌다는데 의미가 크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과거를 정리하고 이전에 없던 거대하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콜로세움을 건설함으로써 도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로마시의 위상을 더 드높이고자 했다.
콜로세움과 전차 경기장 같은 거대 건축물은 황제들의 권력을 드러내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로마의 황제들은 그의 치세동안 거대한 공공건축물을 종종 만들었고, 그중 콜로세움과 전차경기장은 꾸준하게 관리되었다. 세계 어디에도 없을 로마의 건축물은 황제의 권위였고 상징과 같았다. 영화 속의 콜로세움은 검투사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이야기의 배경이 되곤 하는데 당시 콜로세움에서는 검투사의 경기 뿐만이 아니라 전쟁이야기, 고전극과 같은 연극도 상영되었다. 이와 같은 오락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하여 국가의 화합을 공동체의 결합을 도모 했으며 때로는 전쟁 포로를 대상으로 잔혹한 연출을 통해 황제의 힘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전쟁 포로들과 기독교 박해 시절 수많은 기독교 인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리스의 건축양식을 가져왔다. 수많은 아치를 쌓아 원형의 틀을 만들고 난 후 그리스의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반 기둥을 덧붙여 표현했다. 층 사이에는 신전 기둥 위에 위치한 엔타블러처의 메토프와 트리글리프를 가져와 연결했다. 겉에서 보기엔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의 신전을 지붕의 삼각형 박공 형태만 잘라 내어 쌓은 것 처럼 보인다.
로마의 도로는 현대 도로의 원형이 되었다. 그 중 가장 언급이 많이 되는게 아피아 가도 인데 이탈리아의 로마시와 테라치나시를 이어주는 도로다. 로마는 자원의 이동을 위해 수레의 원활한 이동이 중요했고 당연히 그 크기에 맞춰졌다. 이 도로는 수레가 다닐 수 있는 2차선의 도로에 양 옆으로 인도를 두었는데 포장의 두께만 1m에 달해 매우 견고했다고 한다.
로마 건축물에는 공통적으로 아치가 많이 등장한다. 콜로세움과 개선문에는 로마 건축의 특징인 아치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큰 기능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가 기술이 성숙해 지면서 수로교와 다리 건설에 적극적으로 쓰인다. 로마를 언급할 때 많이 등장하는 아치공법은 사실 로마의 발명품은 아니다. 그 이전 시기 이집트와 같은 고대 왕국 그리고 중국에서도 흔적이 발견되나 로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쓰였다. 거대한 제국령을 관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원이 이동이 자유로워야 했고 제국 밖의 국가와 교역하기 위해서는 길이 있어야 했다. 로마의 황제들은 도로와 다리, 수로교와 같이 자원을 효과적으로 이동하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물과 계곡을 건너기 위해 수많은 다리와 도로가 필요했고, 물이 없는 도시에 깨끗한 물을 제공할 수 있어야 했다. 여기서 아치는 적은 재료와 노동력으로 이를 가능하게 했다.
스페인에 위치한 세고비아 수도교의 경우 현재까지 남아있는 로마 수로교중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때 세워진 것으로 전체 길이 728m, 최고 높이 30m, 아치의 수는 166개, 기둥은 120개로 17km에 떨어진 물을 옮기는 수로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듬은 화강암으로만 지어진 이 수로는 지형에 따라 높낮이가 변하였고 아주 작은 경사를 유지하며 도시까지 물을 운반했다. 현재 스페인의 랜드마크 이며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다.
세고비아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살라망카에 로마가 스페인을 지배하던 시절 만들었던 다리가 있다. 강의 가장 긴 폭 구간에 만들어진 다리로 26개의 아치로 건설되어 손상없이 보존되었다. 기원후 1세기 경에 만들어져 2000년간 강을 건너는 길로 사용하는 중이다.
판테온은 로마의 아치공법의 완결판이다. 처음 건축된 판테온은 대화제로 소실된 후 118~128년 하드리아누스 황제 아래 다시 건설되었다. Pan모든+ Theon신들 이라는 의미로 모든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이었는데, 초기 기독교 시기 교회로 개축되었다가 르네상스 시기에는 주요인물의 무덤이 되었고 현재는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까지 쓰이는 유일한 고대 건축물이다. 과거에 소실되었지만 파르테논을 연상시키는 판테온을 둘러 싸는 열주가 있었고, 그 안에 지금 형태의 판테온이 자리했다. 입구는 그리스 신전식이다. 얇은 코린트식 기둥과 거대한 엔타블러쳐 덕분에 아름다운 그리스의 비율을 무시했다는 평도 있지만 내부의 판테온은 누구나 경탄할 건축물이다. 판테온은 둥근 원형의 천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아치 공법을 이용한 것으로 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건축물이다. 이 반원구의 지붕에 중앙에 원형의 구멍으로 태양 빛들어온다. 이는 신전 내부를 골고루 비추고 있어 별도의 조명이 필요 없게끔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이 아치 사용법은 이후 서양 건축사에 꾸준한 영향을 미친다.
로마의 개선문은 이탈리아 외에 과거 모든 로마 제국령에 세워졌다. 개선문은 중앙의 가운데 문을 중심으로 양옆에 작은 문이 들어가 있다. 문 앞 뒤로 부조가 들어간다. 고대 왕국 바빌로니아의 이슈타르 문과 비슷한 형태로 고대인들이 신을 위해 지었다면 로마인들은 황제를 위해 지었다. 후에 개선문은 프랑스 나폴레옹 1세 까지 이어진다. 황제의 승리를 알리기 위한 이 조형물은 도시 한가운데 우뚝 세워져 그 위용을 자랑한다. 초기엔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우기 시작한다. 개선문 벽에는 전쟁에 승리한 장군의 모습이 부조로 혹은 환조로 만들어졌다.. 후에 초대 황제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개선문을 황제만 지을 수 있도록 하면서 개선문은 국가가 관리하는 공공기념물로 성격이 바뀐다. 현재 우리가 보는 개선문은 황제시대 이후 지어진 것들이다.
기념주 역시 과거 국가적 사건을 기념하는 형태로 세워졌다가 공화정이 페지되고 왕권국가로 바뀌면서 황제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크기도 점점 거대해졌는데, 로마에 있는 <트라이아누스 기념주>는 높이가 40m에 달하는 기념주로 표면에 다치아와의 긴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길게 이어진 나선형의 부조를 펼치면 총 200m에 달하는 길이라고 한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미적인 부분보다 설명을 자세히는 기능에 중점을 둔다. 기념주는 빼곡하게 전쟁의 모든 장면을 묘사했고, 그 속에서 조화와 아름다움은 찾기 힘들다. 하지만 어지러울 정도의 자세한 설명으로 로마인들은 타지에서 치열하게 얻어낸 황제의 승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과거 그리스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것을 신의 영역으로 여겨 신상을 만들어 신전에 모셨다. 헬레니즘 시기에는 적국의 비참함을 통해 혹은 신화 속 이야기를 가져와 왕의 업적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고. 로마인들은 직접적으로 전투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국가의 중심점이 신에서 인간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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